그 다음부턴 그냥 자연스러운 만남이 이어졌다. "오늘부터 1일" 라는 어색한 확인은 없었지만 우린 매일 전화했고, 바쁘 와중에도 퇴근을 하면 어떻게든 만날 약속을 잡았다. 주말엔 서로를 위해 요리를 해주게 되었고, 그런 시간들이 너무 소중해지고 즐거워졌다. 하지만 아직 "오늘부터 1일" 이라는 어색한 확인 작업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즐거운 와중에도 계속 고민을 하게 되었다.
1년 후에도, 그 후에도 행복할 수 있을까?
물론 말도 안되는 고민인 건 잘 알았다. 어떤 연애가 그 끝을 생각하고 시작한단 말인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와 필로의 관계는 챌린지 투성이었다. 외국인, 8살 연상,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발령 기간이 정해져있는 주재원의 삶을 살고 있었고, 필로는 프로젝트 때문에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살긴 했었지만, 앞으로 5년 넘게는 베트남에서 계속 살 예정인 사람이었다. 지금 당장은 너무 좋지만, 내가 저 모든 어려움을 견디고 연애를 얼마나 할 수 있을지 용기가 없었다. 지금이야 서로 좋으니 안되는 영어로 더듬더듬하는것도 행복하지만 필로도 언젠가는 나와 100% 의사소통이 안되는 사실에 지칠것이고, 그리고 내가 만약 한국으로 다시 발령이 난다거나 하는 상황이 온다면 롱디연애가 시작된다거나 아니면 다른 중대한 결정을 해야만 했다. 워낙 즉흥적인 성격이라 잘 고민하지 않고 무언가를 선택하긴 하지만, 이번엔 좀 달랐다. 정말 어려웠다.
같이 있으면서도 머릿속은 늘 복잡했다. 그리고 이렇게 복잡하게 생각하는게 필로한테 너무 미안했다. 필로는 정말 있는 그대로 나를 좋아해주는데 나만 이리저리 머리 굴리고 있는것 같았다. 그리고 워낙 세심한 필로는 그걸 바로 캐치한건지 평소답지 않게 어느날 돌직구를 던졌다. "나는 주말에 널 보려고, 몇달 전에 약속한 친구들과의 캠핑도 취소했어. 야근하지 않고 저녁에 널 만나려고 아침엔 1시간 일찍 출근해서 미리 일을 끝내놓고. 나는 이만큼 너를 좋아하고 표현하고 있는데, 너는 아닌 것 같아. 뭐가 너를 이렇게 고민하게 하는거야?"
저렇게 대놓고 물어봐주니 나도 그냥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들을 사실대로 말했다. "나도 너가 좋아. 그런데 그래서 문제야. 너랑 이렇게 즐겁게 오래 오래 만나고 싶은데 나는 곧 한국에 돌아갈수도 있는 상황이기도 하고, 그때가 되면 내가 어떤 결정을 해야만 한다는 사실이 너무 두렵고 무서워." 내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던 필로가 말했다. "그런거라면 정말 다행이야. 나랑 오래오래 있고 싶으니깐 그런 고민이나 생각을 하게 된거잖아. 나중에 우리가 어떤 결정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온다면 그 때 나는 우리 둘이 함께 더 잘되는 방향으로 너가 선택할 수 있게끔 서포트할거야. 미래는 너무 걱정하지 말자. 지금 너가 어떻게 행복해질수 있을지에만 집중하면 돼 " 어떤 구체적인 계획이나 말이 오간건 아니지만 그냥 필로의 따뜻한 그 말이 너무 좋았다. 그리고 그냥 예전처럼 생각없이 한 번 일단 저질러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를 걱정하지 말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한테 집중하자!!!
지금, 행복한 이순간에 집중하자
그렇게 필로와 본격적으로(?) 연애를 시작하고 몇 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우린 여전히 잘만나고 있고, 미래를 막연히 걱정하고 고민하기 보다는 좀 더 구체적인 대화를 나누면서 우리의 미래를 계획하고 있다. 우리의 미래엔 너무 많은 옵션들이 있어서 뭔가를 계획하기가 좀 버겁긴 하지만 그래도 필로가 있으면 올바른 결정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즉흥적인 나와 다르게 필로는 엄청 계획적인 INTJ 때문이어서 그런지 믿음이 가는걸까?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걱정보다는 지금, 여기서, 필로와 행복하기를 결정했다. 앞으로 우리의 관계가 어떻게 될 진 모르겠지만 현재에 집중해서 필로와 뜨겁게 연애를 해 볼 생각이다 :) 그리고 이 감정이 기억이 되고, 기록이 될 수 있게끔 블로그도 열심히 해 볼 생각이다.
우리의 첫만남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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